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공자도 그랬습니다.
사람의 말단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저는 그날 아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줄거리
영화 사도에 대한 시간순으로 짧게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프롤로그
깊은 밤, 비가 거칠게 내리는 가운데 세자는 무덤에서 검을 들고 수구를 통해 경희궁으로 향한다. 세자빈은 급히 세자의 생모인 영빈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만, 세자는 이미 영조의 거처에 도착해 창호를 사이에 두고 영조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첫째 날
1762년 7월 4일, 영조는 세자의 죄를 들어 그를 처벌하기로 결심한다. 영조는 채제공의 반대에도 세자를 창덕궁으로 호출한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가 경화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가 위험에 처했음을 직감한다. 영조는 세자에게 용포를 벗으라 명하고, 세자는 상복을 입고 있는 상태로 무릎을 꿇는다. 영조는 세자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의심하며 자결을 명하지만, 세자는 의금부로 넘길 것을 요구한다. 신하들은 세자를 만류하고 영조에게 자비를 구하지만, 영조는 뒤주에 세자를 가둔다. 세자는 묵묵히 뒤주에 들어가고, 영조는 직접 못질을 한다. 이를 본 세손이 통곡하며 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 애원하지만, 영조는 세손을 끌어내라고 명한다.
25년 전
1737년, 세자 3살. 세자는 붓글씨로 '사치(奢侈)'라는 한자를 쓰며 총명함을 보인다. 영조는 세자의 총명함에 기뻐하며, 세자를 각별히 애정을 보인다. 그러나 영조와 영빈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엄격한 왕가의 법도에 묶여 자라난다. 영조는 세자를 위해 밤을 새며 책을 쓰기도 한다.
둘째 날
1762년 7월 5일, 영조는 세자를 평민으로 강등하는 교지를 작성한다. 세자를 모시던 사람들이 참수당하고, 세자는 생모인 영빈 이씨가 자신에 대한 대처분을 요청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18년 전
1744년, 세자 10살. 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혼례 후, 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려 하지만 영조의 엄격함에 의해 좌절을 겪는다. 영조는 세자의 공부를 엄히 꾸중하고, 세자는 점점 압박을 느낀다.
셋째 날
1762년 7월 6일, 세자는 뒤주 안에서 환각을 보며 고통에 시달린다. 연못에 몸을 던지고 광분하지만, 결국 다시 뒤주에 갇힌다.
13년 전
1749년, 세자 15세. 영조는 세자에게 보위를 전위하려 하지만 반대에 부딪혀 대리청정을 허락한다. 세자는 균역법 시행 등에서 결단력을 보이며 노력하지만, 영조는 매번 그의 정책을 뒤집고 질책한다. 세자는 점점 자신감을 잃고 영조의 눈치를 보며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영조는 나주 괘서 사건, 신하에게 시를 써준 일, 숙종 능행길의 비 등 사소한 일로도 세자를 질책하며 압박을 가한다.
넷째 날
1762년 7월 7일, 세자는 극심한 갈증에 시달린다. 소변을 마시며 생존을 시도하지만 결국 절망에 빠진다. 세자는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0년 전
1752년, 세자 18살. 세자는 태몽에 청룡이 나타났다는 그림을 그려 출산 중인 세자빈에게 전달하며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한다. 실제로 아들이 태어나고, 가족들은 기뻐한다. 100일 후, 세자는 가족들과 함께 영조에게 문안 인사를 가지만 영조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영빈 이씨가 중전의 환갑 문제를 언급하자, 소원 문씨가 무례하게 반응하고 인원왕후는 그녀를 질책한다. 영조는 이에 분노하여 인원왕후와 충돌하고, 인원왕후는 영조에게 보위를 넘기고 물러나겠다고 선언한다. 세자와 신하들이 윤허를 철회해달라고 애원하지만 영조는 이를 거부한다. 결국 인원왕후는 윤허를 철회하고 훙서한다.
그렇게 훙서한 인원왕후의 장례를 치르는 가운데 영조는 세자나 죽일 것이지 왜 대비를 저승으로 끌고갔나며 한탄하자 세자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다 자신의 탓이라며 인원왕후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술을 마시며 기생을 부르고, 궁궐 후원에 무덤을 파게 한다. 영조는 세자의 비행을 꾸짖고, 세자는 영조와 대립하게 된다. 영조는 세자를 질책하고 폭언하며, 세자는 신하들에게 울분을 토한다.
다섯째 날
1762년 7월 8일, 혜경궁 홍씨와 영빈 이씨는 세손을 보호하려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한다. 세자의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세자는 가족들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해진다.
5년 전
정순왕후에게 문안인사를 거부한 세자는 의대증으로 인해 내시를 살해하고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세자는그 늙은이랑은 도저히 같은 궁궐에서 살 수가 없다며 당장 영조를 경희궁으로 옮기라고 검을 들이밀며 일가족을 협박하자, 다들 겁을 먹고 기겁한 상황 속에 여동생인 화완옹주가 자신이 무조건 옮기게 하겠노라 답하게 된다.
여섯째 날
1762년 7월 9일, 세손은 세자에게 물을 전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세자는 뒤주 속에서 살아있음을 신호하지만, 영조는 세손을 외가로 보내버린다.
1년 전
1761년, 세자 29살, 세손 9살. 세손의 학문적 성취에 기뻐한 영조는 세손을 총애하며 세자를 데려가지 않은 숙종의 능행길에 세손을 동참시킨다. 세자는 세손이 받는 총애를 부러워하지만, 세손도 공부의 압박을 느낀다. 세자는 세손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잠시나마 따뜻한 관계를 나눈다. 밤에 영조는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리라고 명하지만 이천보는 이를 거부하고 자결한다. 민백상이 세자에게 조용히 지내라고 권유하지만, 세자는 거절한다. 어머니 영빈 이씨의 환갑에 세자는 그녀를 중전처럼 대우하며 축하하고, 벌레를 쫓기 위해 칼을 휘두르며 과도한 행동을 보인다.
나경언의 고변, 그리고 세자
1762년 5월, 세자 30살. 영조는 세자의 폐위를 고민하며 김상로는 나경언을 사주해 세자의 역모를 고발하게 한다. 채제공 등은 세자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영조는 이를 무시하고 나경언을 참수한다. 세자는 울화로 인해 비행을 저질렀다고 변명하지만, 영조는 세자를 금천교에서 대죄하게 한다. 비가 오는 밤, 세자는 대죄하며 울분을 터뜨리고 혜경궁 홍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조를 죽이려 하지만, 영조와 세손의 대화를 듣고 역모를 포기한다. 세손의 총명함을 보며 세자는 자신의 행동이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깨닫고 눈물 흘리며 검을 내려놓는다.
일곱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10일.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 될 운명의 날. 영조와 사도세자는 마침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간의 진실된 이야기를 나눈다.
영조 : 너의 형 효장세자가 죽고, 내 나이 마흔이 넘어 네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으면 핏덩이인 널 세자로 책봉하고 두 살때부터 제왕의 교육을 시켰겠느냐? 그때 네가 보여준 총명과 슬기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랬던 네가 칼장난하고, 개 그림이나 그리며 공부를 게을리할 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사도세자 : 그래서 신하들 앞에 허수아비처럼 앉혀놓고, 병신 만들었소?
영조 : 너 제대로 된 임금 만들려고 그런 것 아니더냐.
네가 실수할 때마다, 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니?
사도세자 : 그게 어찌 내 실수 때문이겠소?
아버지가 왕이 된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약점을 잡혀 전전긍긍한 것이지.
영조 : 너는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운명을 모르느냐?
저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왕이 되지 못했다면 나는 그때 죽었다. 내가 죽었으면 너도 없는 거야.
사도세자 : 그것을 알기에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소.
하지만,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소.
(울먹이며) 공부가 그리 중한 것이오? 옷차림이 그리 중한 것이오?
영조 : 임금이 공부 모자라고, 대님 하나만 삐딱해도 멸시하는 것이 신하다.
이 나라는 공부가 국시고, 예법이 국시야.
사도세자 : 내가 왜 그날 밤 당신을 죽이지 않고 그냥 돌아왔는지 아시오?
사람이 있고 공부와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공부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국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영조 :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단 말이냐?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감정이 북받치며)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영조 :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뒤주를 연 영조는 아들의 사망을 확인한 뒤 오열하고, 영빈 이씨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며 오열하며 혜경궁 홍씨 역시 눈물을 흘린다. 허나 대외적으로는 역적을 처단한 것이기에 영조는 경희궁으로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울리라고 지시한다. 신하들은 자식 죽여놓고 개선가를 울리는 독한 영조의 행보에 기막혀하는 한편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구겨진 청룡부채를 씁쓸히 바라본다. 영조는 경희궁으로 환궁하며 금천교를 건널때, 다리 위에서 세자가 석고대죄를 하는 환영을 본다.
여덟째 날
1762년 7월 11일, 세자의 장례가 진행되며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화완옹주는 세손의 상복을 벗기려 하고, 혜경궁은 세손을 진정시키며 보위를 이어받아 아버지의 한을 풀라고 한다. 영조는 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14년 뒤
1776년, 정조는 보위에 올라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의 죽음을 기리며 참회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하며 미처 드리지 못했던 물 한 잔을 올리고 오열한다. 혜경궁 홍씨 역시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세자의 명복을 빈다. 정조는 아버지가 그린 청룡부채를 들고 사도세자를 추모한다.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라 하라...
느낀점
영화를 보고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영조는 세자가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교육했지만, 세자는 점점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세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영조는 세자가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갈등이 쌓이고 쌓여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죠.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은 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장면이었습니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절망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그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이 장면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세손의 입장에서 본 영화도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세손은 할아버지인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지만, 아버지인 세자가 겪는 고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족 간의 갈등을 목격하며 자라는 세손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세손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영조의 입장도 이해하려 노력해봤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엄격할 수밖에 없었고, 아들에게도 그런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높은 기대와 엄격함이 결국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소통의 중요성입니다. 만약 영조와 세자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대화했다면 이런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 간의 대화와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부족할 때 얼마나 큰 불행이 닥칠 수 있는지를 이 영화를 통해 배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많은 교훈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소통의 중요성, 그리고 사랑과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영화였습니다.